구한말의 조선사회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양반과 상놈 그리고 중인과 천민이라는 귀천이 분명한 신분제도가 존재하고 사대부들과 선비정신은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구하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망국의 길을 재촉하는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양반이라고 해서 모두가 선비는 아니었다. 유학의 경지를 이룬 선비들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추앙을 받았다.
오늘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부르짖고 있지만 엄연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의식의 기저에 같은 한민족이라는 동일체 의식이 있었을까? 민족이라는 개념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 일제의 침략이 있고 나서야 있었던 일인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렸다고 하지만 그 민족이 양반만의 민족이 아니었을까? 발칙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노예로 살았던 천민이나 상놈들이 양반과 같은 시대정신으로 왕국의 발전과 체제의 안전을 숙고했을 리가 만무하다.
19세기말 선교사로 왔던 제임스 게일은 선비들이 글을 지을 때 전통적인 시구나 문장의 작법 이외에는 절대 벗어나지 않았고, 일생을 끝이 없는 한자 꿰어 맞추기를 하며 보내다 보니 이것이 그의 목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 마음, 영혼까지도 배배 꼬아버리고 말았다고 썼다.
양반은 그 누구도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고 사실상 어떠한 종류의 노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삶은 상놈의 일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것도 벼루에 먹을 가는 것도 다른 사람이 해주어 했다.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직접 하는 것이 없다 보니 손은 비단 같았고 항상 앉아만 있다 보니 뼈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듯했다.
게일은 조선의 교육은 현재에 눈 감고 과거만 바라보고 살도록 한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거나 압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고 봤다.
조선초에 7% 정도에 불과하던 양반의 수가 후기에 들어와 매관매직의 성행과 부패로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지만 뒷짐 지고 팔자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던 양반들에게 아랫것들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발칙한 소리로 유교계가 분통을 터뜨릴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고 천자의 나라 중국만 바라보던 사대부와 왕조가 백성의 아픔을 어찌 알았을 것이며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보듬고 살았을 리 만무하였으며……
지방관들은 소위 로비를 위해 한성에 거주하는 게 다반사였고 지방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하고 옥죄는 거머리 같은 존재였으니…
그래서 선비정신 이런 거 엿 사 먹고 싶다. 양반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리고 왕조를 수호하고 국력을 키우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사색당파로 갈라 당쟁에 몰두한 그들이 양반이요 사대부였다. 그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이 바로 현재와 미래의 먹거리를 좌우하는 이때에도 먹물 먹은 사람들이 염소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며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